쓰레기통에서 신발 부자재를 찾던 청년이
나이키의 인정을 받기까지.
👨🔧 쥬티풀스튜디오 김병희 대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들이 열광하는 신발은 바로 에어조던 1 이다. 에어조던 1이란 신발은 마이클 조던을 위해 바로 이곳 부산에서 태어난 신발이다. 그 신발은 1985년도에 부산 사상에서 처음 생산되었고, 나는 그 해인 1985년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바로 운명이다. 이게 바로 나의 갓생의 시작이다.
나는 신발의 도시 '부산'에서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신발 제조 방식으로 신발을 만들고 있는 '신발 메이킹 커스텀 작가'이다.
부산 바닷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쓰레기는 바로 비닐이다. 이 비닐을 이용해서 에어조던 1을 커스텀 해서 만들어냈고 코로나 시대에 부산 바닷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쓰레기는 마스크였다.
이 마스크를 이용해서도 커스텀 하게 만든 에어조던 1이 많은 분들의 찬사를 받았다. 지난 7월 나는 믿을 수 없는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받았다. 나이키 포틀랜드 본사에서 나의 신발을 받아보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고, 나이키 본사에 내가 만든 신발 6켤레를 샘플로 제출 하였다.
나이키에서 내가 만든 신발이 출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겠지만 나이키라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나의 신발 메이킹 실력을 궁금해하고, 제안을 해줬다는 게 나의 갓생의 일부가 되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발을 만드는 것, 신발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를 표현하고 부산을 표현하고 메시지를 담는 것이 바로 내가 갓생러인 이유이다.
- 출전신청서 갓생스토리 중 발췌 -
Q. 어떻게 갓생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나요?
제가 운영하고 있는 공방 쥬티풀 스튜디오가 이번에 예비사회적 기업에 선정됐습니다. 공방을 운영하면서 시에서 공고 나는 지원 사업을 많이 했는데, 갓생림픽은 뭔가 그것들과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신발계의 스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갓생림픽을 하면 부산에서 조금 밀어주려나?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웃음)
Q. 신발계의 스타가 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요?
일반적으로 신발을 생산하는 과정은 공장을 통해 대량 생산하거나,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신발을 디자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신발을 만드는 행위 자체를 문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지금 제가 운영하는 이런 공방의 형태도 전국에 2개밖에 없습니다. 서울 성수동과 여기 하나죠.
우리 공방은 핸드메이드 신발을 추구하고 있는 공방입니다. 저는 이곳이 신발연구소라고 생각하고, 신발을 커스텀 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신발 과학자 또는 신발연구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발로 못 만드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 계속 신발을 만들고 있는데요. 그 예로 KF94 마스크 30장으로 에어조던을 만들고, 수세미 또는 돗자리, 이케아 리유저블 가방으로도 신발을 커스텀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슈메이킹에 대한 행위 자체를 전파하려고 하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교육도 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신발을 만드는 행위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더라고요. 수강생 중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11월에는 시드니에서도 3명이 수강을 하러 옵니다.
여기서 만드는 신발은 어떤 브랜드의 샘플로 갈 수도 있고, 대중에게 나가기 전에 프로토타입을 만든다고 보면 되는데요. 신발계의 스타가 되고 싶다는 말은 슈메이킹 문화를 만들고, 커스텀 신발을 만드는 중심에 제가 서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발을 만드는 일에 또 부산의 신발산업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Q. 아까 성수동 얘기가 나왔는데, 서울에서 이 일을 할 생각은 없으셨나요?
사실 제가 서울에서 한 4년 정도 살았었습니다. 본업이 음악이었고 가수를 하고 싶었어요. 4년간 연습생 생활을 하다가 데뷔까지 했는데, 망하고 부산으로 내려왔어요. <판타스틱 듀오> 휘성 편에서 우승한 경력도 있어요.(웃음)
그때 서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구둣방에서 알바를 했어요. 1년 동안 은펜이라고 하는데, 닦고, 본드 붙이고 하는 걸 2년 동안 했어요. 그 이후에 겨우 실질적인 일을 조금 맡기더라고요. 거기서 이 일을 배운 건 아니에요. 저는 독학했는데요. 수제화를 만들거나 신발 만드는 일이 후배 양성이 잘 안되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성수동 수제화 사업 쪽도 많이 가라앉고, 카페가 많이 생기는 모습이라 참 안타까워요.
저는 해외에 슈메이커들 유튜브를 영상을 직접 번역기 돌려가면서 찾아보고,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분들을 찾아가서 직접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수동 곳곳을 돌면서 쓰레기통을 뒤졌어요. 거기서 부자재들을 조금씩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가서, 수소문해서 이 재료가 무엇인지 어디서 살 수 있는지를 다 찾아냈죠. 그렇게 신발 만드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수제화를 하다 그만둔 이유가 있는데요. 유럽이나 일본만 해도 핸드메이드 장인들에게서 신발을 삽니다. 백화점에 가지 않아요. 장인이 만든 신발이 곧 명품이 되는 건데요. 우리나라는 좀 다릅니다. 가볍고 가성비 좋은 신발을 찾거든요. 그래서 제가 수제화를 그만두고, 스니커즈 메이킹으로 장르를 바꾼 겁니다. 커스텀 한 신발이 세계적으로 유행을 많이 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쪽으로 바꾸면서 수강생도 늘고 주문도 더 늘었습니다. 포틀랜드 나이키에서 연락이 온 것이 정말 큰 경험이었어요.
6~7개 정도 샘플을 보냈는데, 되든 안 되든 나이키에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가수를 한 번 망했으니까, 두 번 실패는 없다는 생각으로 간절하게 했거든요. 결혼도 일찍 해서 아기도 있었고, 늦게 시작해서 어떻게든 다 따라잡고 싶었습니다.
Q. 가수 실패의 경험이 커스텀 슈즈 제작자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어릴 때부터 신발을 너무 좋아했어요. 맨날 엄마한테 신발 좀 그만 사라고 혼났거든요. 당시에 해외 직구가 뭔지도 모르는 시절에 인터넷에서 어떻게든 찾아서, 진품인지도 모르고 직구로 구매하고 했었거든요. 옷도 안 사고 신발만 사서 모았어요. 대학은 제가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는데요. 당시에 신발 관련된 수업을 엄청 듣고, 다른 수업은 성적이 안 좋아도 신발 관련된 수업은 A+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교수님께서 트렉스타 입사를 권유하기도 했는데, 제가 가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가수를 하려고 자퇴하고 서울로 올라가게 된 거죠.
근데 가수가 망하고 나서는 뭘 하고 먹고 살까 고민을 많이 했고, 부산 내려와서 호텔에서 라이브 공연 일을 하면서 생활했어요. 보통 밤 9시에 일이 시작되는데, 이것만 믿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관심이 있었던 신발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 시기에 결혼도 하고 애도 생겼어요. 근데 참 시기가 그랬던 게 그때부터 나라에 재앙이라고 할만한 사건들이 일어나더라고요. 노래를 하다 보니, 나라에 안 좋은 일이 터지면 제일 먼저 없어지는 일이 엔터테인먼트였어요. 여러 악재들이 터졌을 때 모든 라이브 공연에서 다 잘렸다. 동료들 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래서 제가 더 신발에 매진했었던 것 같아요. 무리해서 공방도 차리고요. 아기 돌 반지, 결혼반지 다 팔아서 공방을 차렸거든요. 처음 차린 공방에서는 사실 너무 안 좋은 일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지금 이곳에 와서 좋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Q. 구체적으로 어떤 좋은 일이 있었나요?